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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1 비상 홍민표 4과 본문 한줄 해석 Mary Seacole, An Unsung Hero of the Crimea

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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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y Seacole, An Unsung Hero of the Crimea

A portrait of an old, dark-skinned lady wearing three medals on her left breast was discovered in 2003.

왼쪽 가슴에 세 개의 메달을 단 늙고 피부가 검은 어떤 여성의 초상화가 2003년에 발견되었다.

 

An antique dealer accidentally found it behind a framed print at a garage sale in Burford, U.K.

한 골동품 상인이 영국 Burford의 차고 염가 판매장에서 액자에 담긴 사진 뒤에서 우연히 그것을 발견했다.

 

He had no idea who the lady was, and when searching for some kind of clue, he only found the artist's initials written on the back side of the painting.

그는 그 여성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고, 어떤 실마리를 찾고 있는 동안, 그림 뒷면에 쓰여 있는 화가의 이름의 첫 글자들만을 발견했다.

 

After passing through various auctions, the person in the portrait was finally identified as Mary Seacole.

많은 경매를 거친 후에, 그 초상화 속의 인물이 마침내 Mary Seacole(메리 시콜)로 밝혀졌다.

 

The National Portrait Gallery in London confirmed that the painting was genuine and purchased it, quoting that "as a woman and as a West Indian of mixed race, she broke many barriers to make a huge contribution to Victorian society."

런던의 국립 초상화 미술관이 그 그림이 진품임을 확인하고는 “여성으로서, 그리고 서인도 제도 혼혈인으로서, 그녀는 많은 장벽을 허물고 빅토리아 사회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구입했다.

 

The portrait has been displayed there since 2004.

초상화는 2004년 이후 그곳에 전시되고 있다.

 

Mary Seacole was born in Kingston, Jamaica in 1805.

Mary Seacole은 1805년 자메이카의 킹스턴(Kingston)에서 태어났다.

 

Her father was a Scottish soldier, and her mother practiced traditional Jamaican medicine.

그녀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군인이었고, 어머니는 전통 자메이카 의료업에 종사했다.

 

Her mother ran a boarding house while caring for wounded soldiers as if they were her own family members.

그녀의 어머니는 부상당한 군인들을 마치 자신의 가족인 것처럼 돌보면서 하숙집을 운영했다.

 

By observing her mother, Mary learned the practice of traditional Jamaican medicine.

어머니를 지켜봄으로써, Mary는 전통적인 자메이카 의술을 익혔다.

 

 

 

Mary also traveled widely to take care of sick people.

Mary는 또한 아픈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널리 여행을 했다.

 

When she visited Panama in 1851, Mary managed to save her first cholera patient, and in so doing she gained extensive knowledge of this disease.

그녀가 1851년에 파나마를 방문했을 때에는 처음으로 콜레라 환자를 구해 냈고, 그러는 동안 이 질병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얻었다.

 

In fact, she herself contracted and recovered from it while in Panama.

사실, 그녀 자신도 파나마에 있는 동안 이 병에 걸렸다가 회복되었다.

 

Having overcome many difficulties, she gained a reputation for her work in treating cholera and other diseases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그녀는 콜레라와 다른 질병을 치료하는 노력으로 인해 명성을 얻게 되었다.

 

It was while she was in London in 1853 that she heard about the Crimean War and the collapse of the nursing system down there.

그녀가 크림 전쟁과 그곳의 간호 체계의 붕괴에 대해 들었던 것은 그녀가 1853년 런던에 있을 때였다.

 

Thousands of men were dying of cholera, dysentery, cold, and battle wounds because of a lack of proper medical care.

수천 명의 사람들이 적절한 의료 서비스의 부족 때문에 콜레라, 이질, 추위, 그리고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She immediately applied to the War Office to go to the Crimea and help the sick and wounded soldiers.

그녀는 크림 반도로 가서 병들고 부상당한 군인들을 돕기 위해 즉시 육군성에 지원했다.

 

In the application process, she stressed that she had considerable experience treating sick soldiers in Jamaica.

지원 과정에서 그녀는 자메이카에서 아픈 군인들을 치료한 경험이 많다는 것을 강조했다.

 

To her disappointment, her application was rejected.

실망스럽게도 그녀의 지원은 거절되었다.

 

She asked herself, "Did these ladies shrink from accepting my aid because my blood flowed beneath a somewhat duskier skin than theirs?"

그녀는 “이 여성들이 내 피가 그들보다 다소 더 거무스름한 피부 아래로 흐르기 때문에 내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을 꺼렸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Nothing, however, could stop her from following her aspirations.

하지만 어떤 것도 그녀가 자신의 열망을 쫓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Mary persevered and founded a firm with Thomas Day, a distant relative of hers, and they went to the Crimea with a large stock of medicines.

Mary는 버텼고 그녀의 먼 친척인 Thomas Day와 회사를 설립하여 많은 의약품을 가지고 크림 반도로 갔다.

 

Mary, who was then 50, was supposed to work officially as a sutler, someone who was allowed to sell goods to soldiers near the front.

그 당시 50세였던 Mary는 공식적으로는 최전방 근처에서 군인들에게 상품을 파는 것이 허용된 사람인 종군 상인으로 일하기로 되어 있었다.

 

As soon as she arrived in the summer of 1855, however, Mary started to take care of the sick and wounded as if she were their mother.

하지만 Mary는 1855년 여름에 도착하자마자, 병들고 부상당한 사람들을 마치 그들의 어머니인 것처럼 돌보기 시작했다.

 

This is why the soldiers of British army came to call her "Mother Seacole."

이것이 영국 군인들이 그녀를 ‘Mother Seacole’로 부르게 된 이유이다.

 

 

 

One of the army doctors testified with admiration that despite the numbing coldness on the front line, Mary Seacole would care for the soldiers and provide them with tea, food, and words of comfort.

군의관 중 한 사람은 전방에서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추위에도 불구하고 Mary Seacole은 군인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차, 음식, 위로의 말을 건네려 했다고 찬사로써 증언하였다.

 

She also braved enemy fire near the front lines trying to find soldiers in need of help.

그녀는 또한 도움이 필요한 군인들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면서 전선 근처에서 적의 포격에 용감히 맞섰다.

 

One news reporter described her as "a warm and successful physician, who doctors and cures all manner of men with extraordinary success.

한 신문기자는 그녀를 “엄청나게 성공적으로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치료하고 치유시킨 따뜻하고 성공적인 의사이다.

 

She is always in attendance near the battle field to aid the wounded and has earned many a poor fellow's blessings."

그녀는 부상자들을 돕기 위해 항상 전쟁터 근처에서 사람들을 돌보고 많은 불쌍한 사람들의 축복을 받았다.”고 서술했다.

 

At the end of the war in 1856, Mary turned out broke. She had spent all her personal wealth in the Crimea.

1856년에 전쟁이 끝났을 때 Mary는 결국 무일푼이 되었다. 그녀는 크림 반도에서 개인 재산을 모두 써버렸다.

 

She returned to England ill and poor.

그녀는 병들고 빈곤한 상태로 영국으로 돌아왔다.

 

Fortunately, there were veterans who never forgot the amazing things that Mary had done on the battle field.

다행스럽게도 Mary가 전쟁터에서 했던 놀라운 일들을 결코 잊지 않고 있던 참전 군인들이 있었다.

 

Some army officers organized a benefit festival to raise funds in her honor.

일부 군 장교들은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며 기금 마련을 위한 자선 모금 축제를 조직하였다.

 

It was reported that to their surprise, thousands of contributors gathered and her name was shouted by a thousand voices.

놀랍게도 수천 명의 기부자들이 모였고 그녀의 이름이 수천의 목소리로부터 연호되었다고 보도되었다.

 

She was also awarded three medals for her bravery and her work from England, Turkey, and France, which is vividly depicted in her portrait.

그녀는 또한 용감한 행동과 노력으로 인해 영국, 터키, 프랑스로부터 3개의 메달을 받았는데, 이는 그녀의 초상화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In 1857, with the help of her supporters, Mary published her autobiography, Wonderful Adventures of Mrs. Seacole in Many Lands.

1857년에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Mary는 자신의 자서전 Wonderful Adventures of Mrs. Seacole in Many Lands를 출간하였다.

 

The last 25 years of her life, however, were spent quietly outside of public attention.

하지만 그녀 생의 마지막 25년은 대중의 관심 밖에서 조용하게 보내졌다.

 

 

 

She died on May 14th, 1881.

그녀는 1881년 5월 14일에 사망했다.

 

During the Crimean War (1853-1856), Mary Seacole was from time to time compared to Florence Nightingale.

크림 전쟁(1853-1856) 동안, Mary Seacole은 Florence Nightingale(플로렌스 나이팅게일)에 때때로 비유되었다.

 

Unlike Nightingale, Seacole had to overcome prejudice related to her race.

Nightingale과는 달리, Seacole은 그녀의 인종과 관련된 편견을 극복해야 했다.

 

Being a born healer, she made her own way to the war where she was needed.

타고난 치유자였으므로, 그녀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전쟁터로 스스로 헤쳐나갔다.

 

In fact, she risked her life to aid the wounded and bring comfort to dying soldiers.

사실, 그녀는 부상자들을 돕고 죽어가는 군인들을 편안히 해주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썼다.

 

While Florence Nightingale became a legend, Mary Seacole was largely forgotten until the year 2003 when her portrait was accidentally discovered.

Florence Nightingale이 전설적인 인물이 된 반면, Mary Seacole은 그녀의 초상화가 우연히 발견된 2003년도까지는 대체로 잊혀져 있었다.

 

Many people believe that she reappeared in history when a hero like her was needed most.

많은 사람들은 그녀와 같은 영웅이 가장 필요시 되었을 때 그녀가 역사 속에 재등장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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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y Seacole, An Unsung Hero of the Crim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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